대한민국French Korean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Corée du Sud
대한민국한국의 발견한불수교역사프랑스 대대>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뱅상 오리올(Vincent Auriol) 프랑스 대통령, 정부 각료들, 앙리 케이유(Henri Queille) 국무회의장, 쥘 모슈(Jule Moch) 국방부 장관, 막스 르죈(Max Lejeune) 국방부 차관은 강력하고 훈련된 보병사단, 대부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부대 출신인 지원병, 참모, 전투함 ‘라 그랑디에르’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군을 진두지휘하게 된 이는 프랑스의 영웅, 바로 레지스탕으로 활동할 때 마그랭 베르네레(Magrin-Verneret)란 이름으로 알려진 알려진 몽클라르(Monclar) 장군이었다.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 외인부대의 지휘관이자 나르빅(Narvick) 전투(1940년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싸운 프랑스군이 거둔 승리 중 하나), 에리트레(Erythrée)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끈 바 있는 명망 있는 지휘관이었다. 몽클라르 장군은 그 동안 18번 부상을 입었고, 18번 훈장을 받았다.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 대대를 이끌고자 정식계급인 별 네 개의 육군준장을 떼어버리고 스스로 육군중령이 되었다.

프랑스대대는 최고의 정예부대 미 8군에 들어갔다. 그리고 프랑스군과 함께 한국군도 힘을 보탰다. 프랑스 대대는 여러 전투를 통해 명성을 빛냈다. 프랑스군은 총검 앞에서 반격을 시도했던 원주에서, 쌍둥이 터널에서, 지평리에서, 1037 고지에서, 소양강에서, 북한강에서, 인제에서,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에서, 금화에서, 철원에서, 티본(T-Bone) 고지에서, ‘화살머리(Arrow Head) 고지’에서, 송곡에서 정가산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연표 참조).

 

1950년 10월 25일 : 밀려드는 중국군 앞에서 후퇴하는 유엔군

중국은 자국의 국경에 엄청난 군사적 위협이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1950년 10월 16일, 린 피아오가 지휘하는 중국 제4야전군이 대규모 병력을 앞세우며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한국전 동안 펭 더화이가 지휘하는 중국 지원병도 개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주 순식간에 중국군은 전세를 바꿔 놓았다. 12월 4일, 중국군의 개입으로 북한군은 평양을 탈환했고, 서울도 재탈환했다. 그러자 유엔군은 반격을 시도했고, 3월 14일에 서울을 다시 탈환한 후 38선의 균형을 견고하게 지켰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을 중국까지 확대하고 싶지 않았고, 결국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 했다. 전투의 움직임이 주춤거렸다. 반격과 공격이 이어졌지만, 양 진영이 모두 막상막하였다. 결국 소련은 1951년 여름에 휴전협정을 맺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양 진영의 회담이 시작되었으며 2년 동안 반목이 계속 되었다. 휴전협정은 1953년 7월 17일에서야 체결되었다. 특히 1952년과 1953년 동안의 전투에서도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전체 희생자의 40%가 이 기간에 발생).

 

1953년 10월 23일 : 프랑스로 귀환환 프랑스군의 영광스런 행진 (몽클라르 장군)

처음에 프랑스 대대에 대해 미군은 어느 정도 회의감을 가졌지만, 눈부신 공적과 희생을 통해 프랑스 대대는 곧바로 연합군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유엔군을 지휘한 헐(Hull) 장군은 1953년 10월에 이렇게 말했다. “유엔군을 도와 보여준 용맹과 위대한 희생정신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는 말을 프랑스 전투부대원들께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몽클라르 장군은 지평리 전투 후 프랑스 대대에게 다음과 경의를 표했다. “이제 여러분은 영광스런 존재입니다.”

Bookmark and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