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장의 발견
한국 경제는 1960년 대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프랑스 기업들은 한국이 기회의 시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53년과 1970년 사이에 한국의 국민총생산은 5배로 증가했고, 1인당 국민소득도 연간 67달러에서 253달러로 증가했다. 한편, 한국정부는 국가 경제를 견고하게 다지고자 힘썼고, 도로, 철도, 전기망 건설 등의 굵직한 산업 프로젝트들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대규모 장비 계약이 체결되면서 한불교역이 비로소 여명기를 맞게 되었다. 1963년에 체결된 장비 계약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컨소시엄 형태로 어선을 제작하는 일이었고, 이 일은 선박 및 철강 해운장비 수출연합이 관리하게 되었다. 이 덕분에 프랑스는 한국에 장기적으로 진출하게 되어 일련의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시장이란 그 때까지 프랑스가 거의 진출하지 않았던 건설, 선박 유지 및 수리, 어장산업 같은 분야들을 가리킨다. 한편, 한국은 한국대로 현대적인 어선이 제작된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이 이선이 만들어지면 어획량에 대한 국내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되고, 본격적으로 수출정책을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한국과 프랑스 모두에게 이익이 된 최초의 장비 계약인 어선 제작 계약은 한불 교역관계를 더욱 증진시키는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 후 팔당 댐과 수력 발전소 건설(1965년), 산업차량 공장 건설과 같은 여러 굵직한 계약들이 체결되었다. 팔당 댐과 수력 발전소 건설에는 여러 프랑스 정부 기관과 민간기업들(프랑스 외무부, 재정경제부, 프랑스 수출보험공사 Coface, 파리바, UEIF, 프랑스 전력청, 슈나이더, Neyrpic, 알스톰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산업차량 공장 설립에는 프랑스 기업들인 Ciave와 Renault-Saviem-Simca가 참여했다.
선구자적인 프랑스 기업들…
한국에 진출한 1세대 프랑스 기업들이 성공을 거두자, 다른 프랑스 기업들이 그 뒤를 잇기 시작했다. 1959년에는 프랑스 무역사무소(French Trading Office)가 설립되었고, 1964년에는 에어프랑스 연락사무소 및 서울지점이 세워졌으며, 1970년대에는 페시네(Pechiney, 1972년), 에어버스 인더스트리(Airbus Industries), CGE 알스톰(Alsthom CGE), 데그레몽(Dégremont), 앵도수에드(Indosuez, 1974년), 론 풀랑(Rhone-Poulenc, 1975년), BNP(1976년), 뷰로 베리타스(Bureau Veritas, 1977년), 크레디 리요네(Crédit Lyonnais, 1978년)가 한국에 진출했다. 대부분 장비재를 중심으로 한 이들 프랑스 기업들은 한국경제의 잠재적 성장과 한국정부가 실시한 제3차 5개년 경제계획에 힘입어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한불교역이 확대될 수 있었다. 1970년에서 1979년까지 한불 교역량은 5천 4백만 달러에서 6억 7백만 달러로 늘어났고, 한국의 프랑스 제품 수입량도 5천 2백만 달러에서 3억 5천 7백만 달러로 증가했다. 한국에 맨 먼저 진출한 프랑스 기업들은 몇 년 후, 정확히 1986년에 “주한 프랑스 기업 협회(French Association in Korea)”를 창설하게 되고, 이 협회는 훗날 1987년에 “주한 프랑스 상공회의소”가 된다.